《신세기 에반게리온》부터 시작된 에반게리온 시리즈, 줄여서 에바를 사랑하는 오타쿠들에게 왜 에바를 사랑하는지 묻는다면 그들은 밤을 새서라도 이 작품의 가치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작품 설정과 진행되는 스토리, 인물의 심리 묘사, 그리고 캐릭터의 매력적인 외형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에바를 사랑하는 이유를 굳이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다만 사람들의 사랑에 비해 〈서〉와 〈파〉, 나아가 에바가 가지고 있는 작품의 정교함은 다소 부족한 면도 존재한다. 신극장판에서는 〈파〉와 후속작인 〈에반게리온: Q〉에서 던져진 복선들이 최종작인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에 이르기까지 회수가 되지 않은 경우가 다수 존재한다.1 인물들의 우울한 감정선과 이를 강조하는 연출은 보는 사람에 따라 과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신극장판이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작품에서 나타나는 TVA판부터 에바가 보여준 20세기 말의 어두운 시대적 분위기가 시간이 흘렀음에도 지속적으로 시의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세계관과 인물들이 보여주는 애정 결핍과 우울감이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두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보다 더 감정적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왜 이런 작품을 사랑하는지 알기 위해 우리도 에바의 파도에 몸을 담가 촉감을 곤두세워야 한다.
TVA판을 본 사람들이라면 〈서〉의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TVA판 6화까지의 스토리와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서〉의 세계관은 절망적이다. 극비 기구인 “네르프”의 일부 인물들을 제외하면 그 정체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괴물들이 주기적으로 지구를 침공한다. 이들은 “AT 필드”라는 무적에 가까운 보호막 때문에 일반적인 인간의 무기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다. 신지는 지구를 거의 반 정도 멸망시킨 세컨드 임팩트 이후 태어난 신지에게 세상이란 건 그저 절망적일 뿐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인 이카리 유이가 죽고 아버지인 이카리 겐도는 자신을 “선생님”이라는 모종의 인물에게 맡긴 뒤 떠났다. 아버지는 14살이 된 신지를 자신이 있는 네르프 본부로 부른다. 에반게리온을 타게 하기 위함이다. 신지에게 세상은 가혹하다. 자신을 버리다시피 한 아버지는 아들을 지구의 운명이 걸린 전장으로 내몬다. 같은 반 친구에겐 자신이 싸우다 도시에 피해가 생겨 동생이 다쳤다며 주먹을 맞는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중학생 신지에겐 가혹한 운명이다.
〈서〉의 결말부에서 야시마 작전이 성공한 뒤 보여주는 레이의 미소 이후 서사의 중심은 신지와 레이의 관계로 옮겨진다. 본격적으로 둘에게 정동하기 위해 〈파〉로 넘어가보자. 지금까지 겐도를 제외하면 감정이란 게 없다시피 했던 레이는 자신을 구한 신지에게서 겐도를 겹쳐 보며 신지에게 호의적으로 변한다. 둘의 감정선은 기묘하다. 미사토의 대사에서 볼 수 있듯 둘의 관계는 사랑이 피어나는 과정에 가깝다. 다만 단순히 이성으로서 서로를 좋아하는 것으로 단정 짓기는 애매하다. 이는 레이가 가지고 있는 복잡한 정체성에 있다. 우선 레이는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 복제품으로 만들어진 클론이다. TVA판과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먼저 본 사람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사실이고, 해당 작품만 보았더라도 음식을 거의 먹지 않고 약을 먹으며 살아가는 레이를 보고, 그리고 그가 복제된 동물들을 보고 하는 대사를 듣고 관객들은 레이가 클론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むり。このこたちは、このなかでしか いきられないもの。わたしと おなじ
무리야. 이 아이들은 이 안에서밖에 살아갈 수 없는걸. 나도 마찬가지야.
레이는 유이의 DNA를 기반으로 한 육체와 릴리스의 영혼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클론이다. 따라서 레이는 인간, 정확히 말하면 신지의 어머니인 유이와 사도의 성질을 동시에 지닌다. 다만 레이는 어찌 됐든 그 자체로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아야나미 레이라는 독립체로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레이가 신지를 위해, 그리고 신지와 겐도의 관계 회복을 위해 요리를 연습하고 식사 자리를 마련한다는 것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신지를 사랑함과 동시에 부자지간을 개선하려는 어머니의 모습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단순히 레이를 유이로 치환하는 것은 작품을 보는데 그리 좋은 관점은 아니다. 일단 유이는 엄연히 말하면 죽지 않고 초호기에 융합되어 있다. 그리고 레이를 독립된 존재로 바라보는 신지의 대사가 〈서〉와 〈파〉에서 꾸준히 등장한다. 레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자지간의 개선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식사 날 진행된 3호기 테스트 기동과 제9사도의 3호기 침투, 더미 플러그 모드가 된 초호기가 파괴한 3호기와 큰 부상을 입은 아스카, 그리고 아버지의 선택에 분노하며 네르프 본부를 박살내려 하는 신지까지. 이야기는 끊임없이 비극으로 치닫는다.
〈파〉의 결말부를 살펴 보기 전에 신지에게로 시선을 돌려보자. 신지는 작품 내내 누군가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식으로 현실을 견뎌왔다. 그리고 신지는 이러한 현실을 피하고 싶어 한다. 다만 제10사도와의 전투에서 신지는 오롯이 자신의 의지, 욕구, 욕망에 충실하며 자신의, 그리고 세계의 운명을 선택한다.
僕がどうなったっていい。世界がどうなったっていい。だけど綾波は……せめて綾波だけは、絶対助ける!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세상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하지만 아야나미는… 적어도 아야나미만은 반드시 구하겠어!
行きなさい、シンジ君! 誰かのためじゃない! あなた自身の願いのために!
가, 신지 군!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야! 너 자신의 바람을 위해서!
작중 계속해서 끔찍한 현실을 회피하고 싶어한 신지는 오직 제10사도에게 0호기와 함께 먹힌 아야나미의 구출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고 아야나미를 구출한다. 그리고 초호기와 레이가 결합하며 서드 임팩트가 시작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레이를 구출하는 신지, 레이를 클론이 아닌 독립된 존재로서 사랑하는 신지, 그리고 세계를 멸망시키는 신지. 신지의 선택으로 세계는 거의 멸망의 직전까지 다다른다. 나기사 카오루에 의해 서드 임팩트가 저지되기 전까지는. 신지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인간의 열망을 보여주는 인간 찬가? 개인의 선택으로 인해 멸망하는 세상으로 보여주는 인간 비판? 세상을 자기 손으로 멸망시킬 수밖에 없는 신지의 기구한 운명?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멸망하는 세상 따윈 알 바 아니라는 듯 신지와 레이를 보여준다. 「날개를 주세요(翼をください)」가 재생되며 관객들은 둘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는 제9사도 때문에 완전히 망가져 버린 레이의 바람 때문이다. 기구한 운명의 신지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라도 해봤으면 하는 관객들의 바람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선택에는 그보다 훨씬 큰 대가가 다가오기도 한다. 예술 작품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그렇다. 근데 아무렴 어떠한가?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그것을 해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짜릿해질 수 있다. 우리는 개인으로서 무언가를 원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우리는 개인이기에 한계를 가진다. AT 필드는 마음의 벽이다. 그리고 에바 시리즈에서 이는 물리적으로 실존하는 형체로 구현된다. 초호기와 레이가 합쳐지며 둘의 경계는 무너진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에바 시리즈처럼 모두 하나가 될 순 없다. 그리고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신지도, 〈Q〉를 지나 〈신 에바〉에 접어든 신지도 모두의 AT 필드가 남아 있는, 모두가 개인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선택한다. 그럼에도 〈서〉에서 〈파〉까지 이어지는 신지의 선택에 우리가 흠칫하는 것은 우리도 가끔은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얻고 싶어 하는 무언가를 생각해 본 적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엔 사랑이 그러하다. 누가 그런 것을 놓치고 싶어 하겠는가. 신지가 레이에게 사요나라(さようなら)처럼 기약 없는 인사를 듣기 싫어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2 소중한 것을 위해 우리는 격렬해질 수 있다. 격렬해지고 싶어 한다. 우리는 사랑이 뭔지 잘 모른다. 그것이 가져다주는 책임도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향해 달려가고 싶어 한다. 그리고 격렬히 달리는 신지는 지구의 종말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우리에게 그 격렬함을 선사한다. 그것이 〈서〉와 〈파〉를 보며 신지에 몰입하는, 그리고 필자가 굳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으로 이어지는 구판이 아닌 신극장판, 그중에서도 〈서〉와 〈파〉로 글을 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