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그리브스(William Greaves)의 영화 <심비오사이코택시플라즘: 파트 1>(1968, 이하 <심비오...>) 속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불안해진다. 이 영화를 제대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영화와 관련된 많은 설명들은 1960년대 당시 뉴욕의 영화계 및 연극계의 상황을 언급하고는 한다. 분명 그러한 논의들은 중요할 것이다. 당시 『카이에 뒤 시네마』와 앤드류 새리스 등의 영향으로 발생한 영화계에서의 ‘작가’라는 개념의 대두, 반문화의 물결, 뉴욕 아방가르드 영화들, 시네마 베리테 등 다양한 줄기들을 이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을 그리브스의 영화 속에서 찾아내면서, 동시에 그리브스라는 감독의 위치성에 대해 고찰해보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에서 분명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찾아볼 수는 있지만, 선명하지는 않은 것들.
일단은 명백해 보이는 것부터 말해보자. 그리브스가 설명하는 <심비오...>의 전체적인 목적은 그가 촬영하고자 하는 영화 <절벽 위에서(Over The Cliff)>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 영화를 촬영하는 제작진의 모습 역시 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섹슈얼리티와 엮여야만 한다. 그리브스에 따르면, <절벽 위에서>는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련성은 어딘가 모호하다. 예를 들어, 그리브스는 카메라를 돌려 저 멀리 있는 가슴이 커다란 여성도 촬영해보자고 제안하는데, 이것이 <절벽 위에서>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영화(그리고 ‘영화’의 촬영 기간)가 지속될수록, 이러한 모호함은 커져만 간다. 제작진들은 이 영화가 무엇에 대한 영화인지 파악하기 어려워한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식의 스토리라고는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그리브스는 시답잖은 농담을 할 뿐, 능력 좋은 감독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연출자가 이러하니, 연기자들의 연기도 좋을 리 만무하다. 마이크는 웅웅거리며 촬영을 방해하고, 촬영장은 통제되지 않은 채로 행인들이 지나다니며 말을 건다. 급기야 제작진들은 회의에 나선다. (이 회의 장면은 그리브스의 판단에 따라 영화에 포함될 수도,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다.) 제작진은 이 영화의 목적에 대한 질문을 하는 한편, 자신들의 역할과 자신들이 이 영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관해서도 토론한다. 그들의 말마따나 그들은 그리브스를 ‘강간’하기 위해 고민하기보다는 그리브스의 마음 속에 있지만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새로운 질문들이 등장한다. 제작진들은 그리브스에 관해서도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이것은 그의 연출 능력의 부재 같은 것 때문은 아니다. 제작진들은 카메라가 돌 때와 돌지 않을 때 그의 행동과 성격이 너무 다름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그리브스도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제작진은 다시 회의를 연다. 그들은 ‘리얼리티’라는 것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제작진 중 한 명은 이 프로젝트가 리얼리티의 층위에 관한 탐구라고 본다. 영화가 촬영되는 한편, 그 촬영 장면들을 또 촬영하는 것은 새로운 사실성에 관한 층위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제작진은 이 영화가 사실성을 구축하는지, 또는 구축하지 않는지에 관한 것과는 무관하다고 말한다. 당장 제작진 회의실 문 뒤에서 그리브스가 그들에게 연출 지시를 내리는 것이 아닌지 관객들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 영화가 사실성의 측면에서 우리를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미로에 가둬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천히 ‘명백해 보였던 것’을 되짚어보자. 먼저 <절벽 위에서>라는 ‘영화’가 존재한다. 이것은 가상의 세계다. 그리고 우리는 연기에서 빠져나오는 배우와 그 ‘영화’를 제작하는 제작진을 볼 수 있다. 이 단계는 나름의 다큐멘터리적 세계를 구축한다. 이것은 현실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다른 한편으로 이 다큐멘터리 바깥에, 사후에 편집된 듯한, 골방에 들어가 있는 제작진들의 회의가 있다. 제작진들은 촬영 내내 자신들이 눈치챈 그리브스의 방향성 상실과 연출력 부족에 대해 논의한다. 혹시 이 모든 것들이 자신(제작진)들을 포함해 아무도 모르게 뒤에서 모두를 조종하고 있는 그리브스의 메타영화적 실험인 것은 아닐까? 영화 촬영을 방해하는 행인들은? 경찰은? 갑자기 화가 나 자리를 떠나는 배우도 제작진 자신들을 속이는 연출은 아닐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넘어 스크린 앞의 관객의 자리에 위치한 우리가 있다. 우리는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제작진들이 의심하며 말하는 모든 말들도 그리브스의 연출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이 영화에서 그리브스는 모든 것일까, 혹은 아무것도 아닐까?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영화’인가? 아니면, 우리는 여전히 여기서 일종의 ‘사실성’을 찾아낼 수 있을까?
<심비오...>와 같은 영화는 관객의 위치를 불안하게 만든다. <심비오...>는 자신이 마치 시네마 베리테적 영화인 양 자신과 현실과 맞닿아 있는 관계를 가시화하여 보여주면서도 자신이 말하는 것이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이 전혀 사실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대부분의 영화들이 지켜내고자 노력하는 사실성의 법칙에 대한 위반임과 동시에, 사실상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에, 영화는 결국 허구에 머문다. 관객이 그 허구에 대해 주의 깊게 살펴보고 관찰하는 이유는 그곳에 일말의 진실이 있을 ‘수도’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2] 우리가 영화를 믿지 못한다면 영화에는 진실이 있을 리 만무하므로, 영화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심비오...>는 영화를 얘들 장난쯤으로 여기게 만들어버린다. 통상적인 극영화처럼 제4의 벽을 세우기 위해 고심하지도 않고, 페이크 다큐멘터리처럼 진실의 외피를 두른 거짓이라고 자신을 포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영화라는 것의 내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영화에 대한 포르노그래피나 마찬가지다. 다소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것은 영화관에서 영사기를 갑자기 끄고 흰 스크린을 보게 만드는 것과 같다. 우리가 집중해서 보던 그곳에 흰 벽밖에 없다면, 우리는 흰 벽을 보면서 눈물 흘리고 웃었단 말인가? 관객은 아연실색한다. 영화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심비오...>는 공포영화와 다름없다.
관객은 하얗게 질린 채 영화관을 떠나면 그만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영화를 보고 난 뒤 무언가를 말해야 할 의무감을 지닌 비평가는 어떻게 해야 할까? 비평은 고대 희랍어로 Kritikos(κριτικός)를 어근으로 하는데, 이것은 무엇인가를 갈라내어 속을 들춘다는 배경을 바탕으로 ‘판단하다’라는 뜻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작품을 ‘정확하게 들추어내는 행위 일반’이 비평이라면, 우리는 <심비오...>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송신자-메시지-수신자의 구조에 기대는 영화 비평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저러한 구조 안에서 영화 비평은 송신자에 대한 예찬이 되거나, 메시지에 대한 독해가 되거나, 수신자의 정동에 대한 일기장이 된다. 그러나 송신자는 ‘죽었고’, 메시지에 사실이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으며, 수신자의 정동은 불확실하거나 너무 순진한 것이라면 비평의 ‘정확하게 들추어냄’은 어디를 향해야 할까?
이 작은 글에서 비평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보는 것은 너무 거창한 일이다. 다만 이 글에서 다루는 <심비오...>라는 영화에 기대어 일종의 데카르트적 질문을 만들어볼 수는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불확실할 때, 확실한 단 한 가지는 무엇인가? 그리브스가 스티븐 소더버그와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심비오사이코택시플라즘’이라는 단어는 아서 벤틀리의 저서에서 발견한 개념 ‘심바이오택시플라즘(symbiotaxiplasm)’에서 가져온 것이라 한다.[3] 벤틀리는 이 단어를 통해 인간의 의식과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 그리고 반대로 인간이 환경을 통제하고 영향을 미치는 환경적인 상호작용을 설명했다. 그리브스는 이 단어 속에 ‘psycho’를 살짝 끼워 넣었다. 그는 <심비오...>에서 영화라는 것은 감독, 제작진, 외부 환경, 심지어는 제작진 각자의 개인사와 카메라 릴의 길이까지 모든 것이 모여 우연적으로 결정된 것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리브스가 ‘psycho’, 정신을 상호작용의 단어 안에 삽입한 것은 우리의 심리가 엄밀히 영화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어떤 일이든 그렇듯이,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심비오...>는 다큐멘터리, 혹은 메타영화, 그것도 아니라면 ‘거짓부렁’이다. 영화에 비평의 지지체가 부재할 때, 비평은 결국에는 비평가 자신에게로 향한다. 비평이라는 것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확실한 것’은 아무래도 나 자신이 영화를 보고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당장은 내가 느낀 것에 대해 충실한다는 것. 그리고 그 지점에서 더 나아가 나에 대해 묻는 것. 이때 비평, 더 나아가 영화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될 것이다. 그것이 비평에 있어 ‘또 다른 것’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섣부르게 말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