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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라, 침묵이여

<2층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중심으로, 로이 안데르손의 ‘인간 3부작’의 리얼리즘에 관하

김지현··14 min read·수정됨 2026년 9월 19일

역사 내 붐비던 인파가 사라지고 칼레에게 스벤과 한 청년이 다가온다. 청년은 스웨덴어가 아닌 언어로 반복해 질문하듯 소리친다. 당황하는 칼레에게 스벤은 청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동생과 싸운 뒤에 화해하지 못한 채로 동생과 함께 러시아에서 처형당했대, 그래서 계속 여동생을 찾아다니는거야. 칼레는 질문한다, 그럼 저 청년은 뭘 어떻게 해야하지? 칼레에게 스벤은 무심하게 대꾸한다, 무슨 말이야, 저 청년은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래서 불행한거야.1

 가장 중요한 질문이자 가장 난감한 질문이 인간 3부작의 중심에 있다. 이 영화들은 인간을 무엇이라고 말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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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적으로 인간 3부작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안데르손의 ‘이렇게’-즉 스타일에 대해 말해보자. 공공연히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음이 드러나는 세트풍경을 밝히는 창백한 색채의 빛은 전경과 중경, 후경을 단절시켜 원근감을 극대화하고, 원씬원컷2의 연쇄는 관객으로 하여금 단 하나의 시점을 통해서만 상황을 목격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이에 더해, 단독 주인공을 통해 연속성있는 사건의 연속을 제공하는 서사 대신 다중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으며, 주인공 외 조연에게 러닝타임의 상당부분을 할당함으로써 중심성을 희석시킨 파편적 서사는 고전 서사의 중점인 배우-인물과 관객의 감정이입-동일시를 방해한다. 이러한 안데르손의 스타일은 형식주의-아방가르드를 환기시키지만, 정작 자신은 <you, the living>을 제작한 후 진행한 한 인터뷰3에서 스스로를 부뉴엘과 펠리니에게서 영감을 받은 ‘리얼리스트’라고 칭한 바 있다. 노동계급이라는 배경 속에서 자신이 보고 자라온 것들에 천착해 영화를 만든다고 덧붙이며 말이다.   

 고전적으로, 이미지는 리얼리즘의 궤적과 표현주의 궤적의 이항대립으로 간주되어 왔다. 특히나 회화보다 사진과 영화에 있어, 리얼리즘이라는 필터는 이미지의 고질적인 문제인 ‘재현’을 관통한다. 리얼리즘적 렌즈는 -각종 후보정 및 조작기술을 차치하고 단순한 옵스큐라에서 시작하는 사진/영화의 매체특정성에 주안점을 둔다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한, 화가의 붓질이나 소설가의 만년필과는 명료하게 구분되는 ‘지시성’을 그것의 특장점으로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의 지시성은 대상을 곡해하지 않는 순수한 지시성, 즉 누구나 이미지를 통해 대상을 알아보고, 그것을 우리가 언어체라고 부르는 일련의 사회적 구성물로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이미지를 제시할 때, 사과는 일반 관객으로 간주되는 불투명한 수용자에게 반박할 수 없는 하나의 관념, 빨갛거나 녹빛을 띄는 구형의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여 있는 수분감을 머금은 과실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과의 관념을 벗어나는 상상적 가공은 금기시된다. 현실을 벗어나지 말라는 강령은 현실의 ‘너머’를 상상하고 표현하지 말라는 뜻이기에, 리얼리즘과 형식주의 간의 대립은 현실과 환상의 대립으로 확장된다.
 너무 편향된 시선으로 리얼리즘을 요약했을까? 앞선 내 설명에 편견 내지는 불쾌함이 담겨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리얼리즘이 목적하는 이데아인 ‘현실’은 무엇인가? 현실은 ‘순수하게 포착 가능’하거나, 혹은 모두에게 공유되는 일반명사로 간주될 수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순수한 현실’ 따위는 재현할 수도, ‘현현’시킬 수도 없고, 오로지 개인의 물리적 신체를 통해서만 경험되는 주관적인 형용사로서의 ‘현실적인 것’만을 끝없이 미끄러지면서 간신히 언어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앙드레 바쟁은 『영화란 무엇인가?』 라는 다소 오만한 제목의 저서에서 “현실적인 것도 상상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오직 예술가 자신만의 것이요, 현실의 살과 피를 문학이나 영화의 그물 속에 잡아두는 것은 상상력의 가장 순수한 판타지를 그들 그물 속에 잡아두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다”(371)며 네오리얼리즘4에 찬사를 보낸다. 이 글에서 관심을 두고 있는 대목은 리얼리즘과 표현주의를 이항대립으로 설정하면서-동시에 미끄러지는 대목이다. 예컨대, “표현주의라는 이단이 종말을 고한 이래로, 특히 발성영화 이래로 우리는 영화가 리얼리즘을 향해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영화는 일반적으로 영화적인 이야기의 논리적 요구와 현 시점에서의 기술적인 한계 내에서 현실에 대한 가능한 한 완벽한 환상을 관객에게 주고자 한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하자”(372)는 말에서는, 언뜻 그가 분석하는 리얼리즘이 ‘표현주의라는 이단의 종말’ 이후에 도래한, 표현주의의 대척점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곧이어 “모든 예술의 가장 사실주의적인 예술조차도 공통의 운명을 공유하게 된다. 그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통째로 포착할 수가 없다는 것이며, 현실은 어떤 측면에서 반드시 그것으로부터 빠져나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언제나 이 현실인가 저 현실인가 하는 사이에서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377) 라며 현실의 다면성을 인정하며 영화란 근본적으로 ’현실을 가공’5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선택’해야한다는, 현실을 에워싸고 있는 시각주체, 언어주체의 주관성을 강조함으로써 양 극은 맞닿게 된다.


 결과적으로, 리얼리즘에서는 언제나 소유격의 수식이 방점이 된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리얼-현실은 어떤 배경에서, 어떤 시공간에 속해있는 누가 구현한 현실인가? 라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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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데르손을 소유격으로 삼는 인간 3부작의 현실은 단절을 통해 구현된다. 언급한 바와 같이, 시공간(스튜디오, 파편적 서사)적 단절, 시점적 단절, 감정적 단절(배우)이 중첩되어 어느 하나도 유기적으로 연결되거나 연속성을 가지고 제시되는 것이 없는 상황에서 고립에 처한 관객은 지도없이 산행하듯 영화 속 상황을 따라가게 된다. 시간이 흐르기 때문에, 아주 주도적인 것도 아니고 -영화는 소설이나 만화, 미술관의 전시작들처럼 관람 방향과 동선을 선택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아주 당위적인 것도 아닌 -마음에 안 들면 영화관을 나가거나 모니터 속 화면을 끄면 된다- 상태의 관객은 이들이 하는 생뚱맞은 말과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을 유심히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중첩된 단절들은 관객들의 무심한 관심 속에서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2층에서>를 살펴보자.  서사의 측면에서, 영화는 두 남자의 해고 사건으로 시작되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총 다섯 개의 씬으로 구성된 해고 시퀀스가 끝나고 나면 금방 마술사에게 서사의 중심을 건네준다. 하나의 커다란 중심을 두고 중심 인물의 예측 가능한 이야기를 따라가는 대신 끝없이 재형성되는, 새로이 등장하는 각기 다른 조연들의 파편적 이야기가 연쇄적으로 등장함으로써 긴장과 해소가 영화의 전반에 걸쳐 반복되고 영화를 대하는 관객의 주의는 한 명의 개인을 ‘내밀하게’ 관찰하는 대신 다양한 사람들의 일면을 ‘얕고 넓게’ 관찰하는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또한 영화가 진행되면서 조연들의 삶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채로, 공간을 중심으로 느슨하게 이어져있음이 드러남으로써 -<2층에서>의 플롯은 낡은 카페테리아, 도로 등의 교차적 공간들을 중심에 두고, 나선형으로 구축되어 있다- 서사적 양식성은 현실성과 조응하게 된다. 사회는 개체들이 부분이 되어,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방식이 아니라 개체라는 파편이 느슨하게 사회라는 그물망을 유랑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는 현실 말이다.

 이에 더해 영화가 고집하는 단독 시점은 마치 관객이 영화 속 조촐한 개체들과 같은 공간에 ‘속해있다’는 감각을 부여한다. 카메라의 자유로운 이동, 4차원의 유영을 통해 인간의 물질적 한계를 초월하는 시각적 유희를 즐길 수 있다고 한다면, 단독시점은 육체라는 물질적 한계를 극대화시키며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의 물질적 한계6와 영화 내 시점의 한계를 일치시킨다. 일상성과 똑같은 방식으로, 한 곳에서 하나의 시점밖에 취하지 못하는 관객은 극 중 인물들과 비교해 더 많은 권력도 더 많은 시각적 정보도 부여받지 않는다. 전능한 시선이 소박한 민주적 시점으로 되돌아옴으로써, 영화의 환상 -절대권력으로서의 시선주체인 관객-은 좌절되며 역설적으로 ‘현실성을 띈’ 시선이 복권된다. 더 이상 권력이 담보되지 않는, 영화의 어법이 구현해낸 권력이 유지되지 않는 상황에서 프레임 속 스쳐가는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과 영화 바깥의 관객은 더 이상 차등을 갖지 않는 동등한 자리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끝끝내 해결되지 않는 교통체증의 도로는 이와 같은 차등없음의 메타포로서 영화 전반의 반복구 역할을 수행한다. 도로는 꽉 막혀 있지만 왜 체증이 시작되었는지, 도로에 갇혀 나가지 못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누구인지를 극 중 인물들도 관객들도 알 수 없다. 그저 질문을 던지며 -이 체증은 왜 시작되었으며, 언제나 끝날 것인가?-, 홀로 이 도로에 갇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도하며 묵묵히 견딜 뿐이다. 말하자면 홀로 있는 동시에 함께 있는 법. 바로 이 점이 관객으로 하여금 주의를 기울이고, 호응하도록 요청하는 안데르손의 ‘인간존재’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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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인간은 다면적이고, 우리는 누구나 별 특별할 것 없는 대명사이기 보다는 유별나게 도드라지는 고유명사이기를 바란다. 몇 명의 이름을 예로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마오쩌둥, 피노체트, 고트발트, 아이젠하워, 대처 …. 이 밖에도 열거할 수 있는 이름들. 이 이름들은 개인을 호명하는 것 이상을 지시한다. 권력, 이익, 독점 등과 같은 불투명하고 유동적인 관념들 말이다.  우리가 꽉막힌 도로 위에서 시간을 때우는 승용차 수백 대 중 한 대의 무게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라면, 그 현실을 ‘감각하는’ 우리 개별의 욕망은 개별성의 취득, 고유명사의 취득이다.

 <2층에서>의 이러한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는 ‘현실성’의 역할은 칼레Kalle가 부여받는다. 그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일정한 시간선을 구축할 수 있는 인물로, 평범성과 개별성의 모순적 양태를 그려냄으로써 <2층에서>를 스웨덴 인종청소7에 대한 알레고리로 끌어 올리는 지렛대 역할을 수행한다. 

 칼레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보험금을 수령하기 위해 자신의 가게에 불을 지르고 돌아와 아내를 끌어안고 자신의 불안을 토로하며 눈물을 보이고, 정신적 난파상태에 놓인 아들을 찾아가 왜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으로 살지 못하느냐고 윽박 지르며, 친구의 돈을 빌린 뒤 정작 친구가 경제적 곤궁 상태에 놓여 자살에 이르자 죽은 사람에게 갚을 빚은 없다며 묵인하는 사람, 그럼에도 성당에 찾아가 자신의 기구한 팔자를 호소하고, ‘0을 하나 더 추가하기 위해 extra zero’ 사업가 친구의 터무니없는 장광설에 휘둘려 쩔쩔매는, 지겨울 정도로 평범한 사람이다. 영화 속 수많은 여타의 개인들과 차등을 준, 열거할 수 있도록 제공된 정보들은 그가 하는 ‘행위들’을 그를 ‘유별나도록 만드는’ 구성요소가 된다. 영화의 바깥에서는 평범하다고 간주되는 자기-중심성과 모순들이 그를 유별나도록 만든다는 말이다. 칼레의 개별성은 극을 통해 안데르손이 제시한 ‘소박한 보편인간’에 대항함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일상에 만연하다는 점에서 아렌트8적인 이 평범함을 구축한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에서 홀로코스트 가담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관하며, 20세기의 악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 말한다. 어떻게 홀로코스트가 가능했을까? 어떻게, 파시즘에 그토록 많은 독일인들이 열광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만연해지는 폭력에 무감할 수 있었을까? 여하의 질문에 대해, 아이히만의 진술을 듣고 난 후 아렌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그들의 눈 앞에서 실제적인 폭력이 자행되지 않았고, 그들은 홀로코스트와 유관한 업무를 단순한 ‘행정적 절차’, 일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에 학살이 가능했다. 관련 업무를 수행한 이들에게 공문서를 통해 적혀진 이름과 숫자는 그것의 활자성 외에는 무엇도 의미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무심함은 가능했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the Evil’은 이러한 무심함과 사유없음의 보편성을 고발하며 포스트홀로코스트의 주류 담론으로 자리했다. 

 결코 동의하거나 자연스럽다고 말할 수 없지만, 사회체 내에서 자연스럽게 폭력에 동조하는 것. 평범한 가해는 변명을 수반하고 -어쩔 수 없었어- 피해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채로 가라앉는다. 언제나 타당한 구실을 찾아내는 가해자들은 단숨에 수난자로 자신을 위장한다. 칼레가 재만 남은 가게에서 보험조사관들에게 가게의 가치를 읍소하는 동안 창 밖으로 보이는 자신을 채찍질하는 고행자들의 통곡은 평범한 파국의 중첩된 목소리로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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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한 번. 스벤의 말을 복기해보자. 가라앉은-이들이 슬픈 이유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다. 죽은 자에게는 자신을 항변할 수 있는 기회도, 자신의 후회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도 없다. 모든 행위에 대한 가능성의 박탈. 그것이 죽은 이들을 영원히 짓누를 최종의 가해라고 한다면-아직 죽지 않은, 무수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머뭇거리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적어도, 이에 대한 안데르손의 의견은 어떠한가?

 

 영화가 관객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를’ 요구하듯, 영화 또한 말할 수 없는 자들, 가능성이 박탈된 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의 말을 듣고자 한다. 스벤은 러시아 청년의 외국어를 번역해 칼레에게 전달하고, 영화는 러시아 청년의 기억을 재연함으로서 그의 뇌리에 박혀있는 마지막 이미지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배치된 투신당하는 소녀의 모습과 엔딩 시퀀스9 속 좀비와 같은 모습으로 느리게 칼레를 향해 다가오는 일군의 사람들은 추락-상승의 조응을 이루며, 문자 그대로 영화 내 줄곧 보아왔던 화이트칼라의 관료들, 군인들과 동일한 위상에 자리한다.

 이 두 번의 축출. 영화의 환상을 위해 지켜지던 관객-권력의 축출과 성과의 뒤에 숨어 학살에 가담하던 관료-권력의 축출. 만일 안데르손의 인간의 본질이라고 부르는 것, 그가 선택한 현실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완벽한 환상’은 두 번의 과감한 축출을 통한 수평성의 복권이지 않을까.  

주석

  1. 1.<2층에서 들려오는 노래>, 로이 안데르손
  2. 2.카메라를 한 자리에 고정시킨 상태로 하나의 시퀀스(한 사건의 단위)를 전개하는 것을 말한다. 기술적 관점으로는 한 쇼트의 길이가 서사적 관점에서 하나의 시퀀스와 상응한다고도 설명할 수 있다.
  3. 3.Megan Rather, ‘The “travialist cinema” of Roy Andersson: an interview’,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Film Quarterly. sep 2015; 69(1):36-44.
  4. 4.2차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영화사조로, 전후의 황폐해진 독일의 풍경과 동서로 양분된 국가적 분열의 고통, 불안정한 경제 및 사회환경으로 인해 야기된 불안을 전면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기술적 발전으로 카메라의 이동성이 향상되며 야외촬영, 핸드헬드 등의 거칠고 위태로운 촬영적 기법을 공유한다.
  5. 5.영화는 눈에 보이는 것을 임의적 구성인 프레임으로 잘라내고, 시간을 시퀀스와 씬scene, 쇼트의 단위로 분절해 재조합한다.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사건들은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개연성을 위해, 개연성이 있다고 간주될 법한 근거를 찾아내 조립된다. 나아가 각각 에이젠슈타인과 푸도프킨에게서부터 이론화된 몽타주는 단일 이미지의 연결이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반응을 일으킨다고 간주하며 가설 (이미지의 연속은 사람들에게 감정적-이성적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을 현상화한 임상실험에서 시작된다. 영화의 제작과정에 있어서는, 앞서 말한 바대로 논리적 타당성-개연성과 핍진성을 구축하기 위해 촬영장 ‘속의’ 배우와 제작진의 시간은 미분된다. 전체를 구성하지 않아 부분이 될 수 없는 이러한 파편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부분적 영화는 바쟁의 말대로 ‘전체라는 환상’을 부여하기 위해 헌신한다.
  6. 6.초월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텐데, 관객은 4차원 현실의 극장에 속해있지만 동시에 2차원의 스크린 ‘너머’, 극 중의 4차원에 시선으로 존재한다. 극장 속 관객은 좌석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종속되어 있으나, 그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스크린 너머의 극 속에서 그의 물리적 한계는 보상을 더해, 인간의 물리적 한계 이상으로 극복된다. 관객은 새의 시점으로도, 물고기의 시점으로도 볼 수 있다. 심지어 극 속의 인물들은 자신이 ‘보여지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전제가 더해지며, 초과 불가능한 시각의 초월성은 완성된다.
  7. 7.1922년 세워진 스웨덴의 국가산하 기관인 인종생물학 국가연구소는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환자, 미혼모, 빈곤층, 스칸디나비안 외 복합인종 등 우생학적 관점에서 유전적으로 ‘열등한’ 이들에게 그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단종수술을 자행했다. 자세한 내용은 첨부하는 두 개의 링크를 참고.1. Stephanie Hyatt, 「A Shared History of Shame: Sweden's Four Decade Policy of Forced Sterilization and the Eugenics Movement in the United States」, Indiana International & Comparative Law Review; vol,8 no.2(1998), p. 476-477, “Swedish victims of sterilization were perceived to be lesser human beings, flawed by unacceptable mental, social, and socioeconomic characteristics; many weresaid to suffer from "genetic inferiority."" "To prevent this genetic heritage from being passed on, they were sterilized-sometimes involuntarily.”Dagens Nyheter revealed that Swedish citizens were subject to involuntary sterilization from the 1930s to 1976 on the grounds of having undesirable racial characteristics or otherwise "inferior" qualities, such as very poor eyesight, mental retardation, or an "unhealthy sexual appetite,"" as described by authorities at the time.”

2. https://www.washingtonpost.com/archive/politics/1997/08/29/sweden-sterilized-thousands-of-useless-citizens-for-decades/3b9abaac-c2a6-4be9-9b77-a147f5dc841b/
  8. 8.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9. 9.해당 장면은 조지 로메로의 좀비 영화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전해(?) 지는데, 이또한 흥미로운 지점이기도 하다. (여력이 없어 본문에서는 다루지 못했으나) 좀비장르의 기본 공식은 다음과 같다. 1.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온다는 금기의 위반, 2.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지만, 그들의 육체만이 살아 돌아올 뿐 이성은 기능하지 않는다는 이성적 세계관의 공포, 3. 그들이 깨어나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과학적 근거없음의 공포. 근래의 운동성이 몹시 탁월한 좀비들과는 다르게, 로메로의 ‘느린 좀비’는 다소 유물론적인 기반을 가진 좀비 장르의 원안의 특장점을 극대화했다. <2층에서> 엔딩 장면의 유령들의 느린 움직임 또한 마찬가지로 ‘인간의 불완전성’을 감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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